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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생활

하노이 주부의 하루 | 반복 노동, 무형 노동, 한마디가 만들어내는 힘,현실적인 지원

by swami 2026. 5. 16.

지친 주부의 모습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두 시간 동안 열심히 닦고 치웠다.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런데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거실 한가운데는 다시 장난감 밭이 되어버렸다. 베트남에서 아이를 키우며 하루를 보내다 보면, 이런 허무함이 매일 반복된다. 그렇다면 이 끝없이 소모되는 에너지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끝이 없는 반복 노동,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예상 밖이었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집에 있으면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직접 겪어보니, 주부의 하루는 소위 말하는 ‘시지프스의 노동’에 가깝다. 시지프스의 노동이란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끝없는 반복 작업을 의미한다. 가령, 청소를 하면 다음 날 다시 먼지가 쌓이고, 빨래를 개면 또 빨랫감이 나온다. 계절이 바뀌면 옷과 이불을 교체해야 하고, 한동안 넣어두었던 계절 용품도 어느 순간 다시 꺼내야 한다. 분명 하루 종일 움직였는데도 집안일은 완성이라는 개념이 없다.

직접 경험해보니 특히 힘든 부분은 반복의 밀도가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점이었다. 장난감 정리를 예로 들자면, 아이에게 가지고 논 뒤에는 제자리에 두도록 계속 훈육하고 있다. 하지만 매번 그것을 실행하게 만드는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체력 소모이다. 그냥 내가 치우는 편이 빠를 때도 있지만, 그러면 교육적으로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해도 에너지가 들어가는 구조이다.

특히 육아와 집안일은 ‘한 번 끝내면 해결되는 일’이 거의 없다. 밥을 차리면 설거지가 남고, 청소를 하면 금세 다시 어질러진다. 하루의 대부분이 유지와 관리에 사용된다. 그래서 주부의 피로는 단순한 육체 노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신적 부하(Mental Load),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 노동

심리학에서는 이런 반복적 가사 노동의 피로를 ‘정신적 부하(mental load)’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정신적 부하란 집안이 돌아가도록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억하고, 계획하고, 결정해야 하는 인지적 노동을 말한다. 예를 들면, 냉장고 속 재료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 확인하는 일, 유치원 행사 날짜를 기억하는 일, 아이 상비약과 영양제 재고를 체크하는 일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런 노동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본인조차도 “오늘 뭐 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고, 가족 역시 노동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이라는 환경은 이런 부담을 더욱 크게 만든다. 한국에서는 익숙한 시스템 안에서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해외에서는 언어 장벽을 넘으며 전부 직접 처리해야 한다. 병원 예약 하나, 배달 주문 하나에도 에너지가 들어간다. 예상치 못한 변수까지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베트남에서 주부로 살아가며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에너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소모품 재고 관리: 식재료, 간식, 영양제, 세제, 휴지, 위생용품 상시 체크
  • 계절 대응 노동: 옷과 이불 교체, 계절 용품 수납 및 정리
  • 아이 훈육 에너지: 정리 습관 형성을 위한 반복 지도
  • 가사 유지 노동: 청소, 세탁, 설거지 등 끝이 없는 루틴 작업
  • 인지적 일정 관리: 유치원 준비물, 병원 일정, 생활 정보 수집 등 무형 노동

국내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업주부의 하루 평균 가사 노동 시간은 약 5시간 이상으로 집계되어 있다. 다만 이 수치는 눈에 보이는 신체 노동 중심으로 측정된 결과이며, 정신적 부하는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실제 체감 피로는 통계보다 훨씬 크게 느껴질 수 있다.

알아주는 한마디가 만들어내는 힘

직접 경험해보니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해결책은 결국 ‘인정’이었다. 책장을 깔끔하게 정리한 날, 퇴근한 남편이 “어? 책장이 엄청 깔끔해졌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말 별것 아닌 한마디였는데, 이상할 정도로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감각이 생겼다.

이런 감정은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노동의 의미감(sense of meaning in work)’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가치 있게 인식되고 있다는 경험이 지속적인 노동 동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주부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보상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보이고 있다”는 감각에 가깝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 연구에서도 양육자의 정서적 소진은 사회적 인정 부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분석한다. 쉽게 말해, 주변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수록 번아웃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번아웃(burnout)이란 장기간의 스트레스와 피로 누적으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를 의미한다. 돌아보면 나 역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날에는 괜히 더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작은 변화 하나라도 남편이 알아봐 준 날에는 다음 날도 뭔가 더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것이 청소든, 냉장고 정리든, 수납 정리든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정과 칭찬은 다음 행동을 이어가게 만드는 힘이 된다.

주부에게 필요한 가장 현실적인 지원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인정이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요즘은 두 가지를 의식적으로 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나는 스스로 먼저 티를 내는 것이다. “오늘 책장 정리 다 했어”라고 먼저 말하는 일이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혼자 알아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하루가 끝났는데도 “오늘 한 일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을 계속 처리하며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려 한다. 집 안에는 늘 어딘가 거슬리고 정리해야 하는 공간이 남아 있다. 그 압박감은 생각보다 크다. 마치 해야 할 일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이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결국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주부의 일은 결과물이 오래 남지 않는다. 그래서 더 의식적인 인정이 필요하다. 가족에게도,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하루 종일 애썼는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역설. 어쩌면 그것이 주부 노동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역설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다음 날 다시 움직일 힘이 생긴다. 나는 그것이 주부에게 필요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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